정 선(鄭敾)

정선(1676~1759) 본관 광주(光州). 호 겸재(謙齋)·난곡(蘭谷). 약관에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畵員)이 되고 그 뒤 현감을 지냈다. 처음에는 중국 남화(南畵)에서 출발하였으나 30세를 전후하여 조선 산수화(山水畵)의 독자적 특징을 살린 사생(寫生)의 진경화(眞景畵)로 전환하였으며 여행을 즐겨 전국의 명승을 찾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1740년 양천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이수정”, “소요정”, “공암층탑”, “양천현아”, “종해청조”, “소악후월”, “소악루”, “개화사” 등 강서를 배경으로 한 많은 작품을 남겨 오늘날 이 고장의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양동 소재 궁산은 겸재의 기념지임.
저서에 『도설경해(圖說經解)』가 있고 그림 작품으로는 『입암도(立巖圖)』『여산 초당도(廬山草堂圖)』『여산폭포도(廬山瀑布圖)』『노송영지(老松靈芝)』등이 있다.


허 준(許 浚)

양천허씨로 손꼽히는 또 한사람의 인물로는 허준이 있다.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岩)인데 양천현 능곡동(강서구)에서 1539년 3월 5일 허론(許?)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서자이기 때문에 당시 적서차별로 인해 문벌과 천재적 자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기술관으로 내의원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엄격한 가정교육과 선대부터의 교훈으로 다져진 인격이 궁중에서도 인정받게 되어 내의로서 입신의 영예를 받았고 1590년에는 왕자의 병을 고쳐서 왕의 특명으로 승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왕이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자 계속된 피난길에서도 끝까지 왕을 시종하여 1606년에는 양평군에 봉해지고 숭록대부에 올랐으나, 중인출신에게 당상관의 위계를 줄 수 없다는 제신들의 반대로 취소되기도 하였다.
세조가 붕어하고 1608년 광해군이 계승하자 선조가 병으로 서거한데 대한 어의로서의 책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던 차, 그를 시기하던 무리에 의한 모함으로 한때 파직되어 적소에 유배되는 불운을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허준은 적소에서 갖은 인고와 싸워가며 『동의보감』의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마침내 1609년(광해군 1년) 적소로부터 유배가 풀어졌으나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주위의 모함과 집권자의 멸시와 학대뿐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참으며 방환된 이듬해 15년간에 걸친 피눈물나는 노력의 결과인 『동의보감』을 완성하여 1610년 8월 6일 광해군에게 바쳤다. 광해군은 감탄해 마지않았으며 그의 노고를 위로하며 포상을 대신해서 그의 일생일대의 숙원인 서자의 불명예를 씻어주었다. 곧, 특별교지로 “이후로 양천허씨에 한해서는 영구히 적서의 차별을 국법으로 금한다”는 것이었다. 1615년 8월 17일(양력 9월 9일) 허준은 77세를 일기로 선조의 고향인 양천의 허가바위굴속에서 일생의 대작인 『동의보감』을 어루만지면서 연구와 고난으로 일관된 생을 마치게 되었다. 양평군(君)으로서 예우에 따라 100일 동안 장사지낸 후 당시 파주목사로 재직하던 아들 <허겸>이 부친의 시신을 허가바위 앞 공암나루에서 배에 태워 임진강으로 모시고가서 파주군 진동면 하포리에 모시게 되었다.


김도연 (金度演 : 고종 31년 1894~1967)

정치가. 독립운동가. 호는 상산(常山)이고 염창동 출신이다.
1913년 일본 금성중학교를 졸업 , 1919년 경응대학 이재학부를 수료했다.
1915년 말, 겉으로는 학술연구를 표방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비밀 항일 결사인 조선학회(朝鮮學會)에 가입하고, 1918년 1월 간부 개선 때 서기(書記)로 피선, 1919년 1월 6일 동경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학우회 주체로 웅변대회를 가장, 독립운동 방법을 숙의하고 그 대표위원의 한사람으로 피선. 2월 8일 재일본 동경 조선청년독립단(在日本 東京 朝鮮靑年獨立團)의 일원으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27년 미국 콜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1931년 아메리칸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후 연희전문학교 강사로 취임.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흥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1945년 봄 출감했다. 광복 후 우파(右派) 진영의 한국민주당 총무로 정계에 투신, 1946년 3월 입법의원을 거쳐 같은해 12월 과도정부입법의원에 피선되고,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재경분과위원장(財經分科委員長)에 피선되고, 8월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재무장관에 취임, 한·미 경제협정 교섭시 한국측 대표로 활약했다. 1945년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으로 3대 국회에 진출, 1955년 민주당 고문에 추대, 4·5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국회 부의장에 피선됐다. 4·19혁명 후 8월 국무총리 지명에 실패, 11월 민주당 구파(民主黨 舊派) 동지들을 규합, 신민당 위원장이 되었으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의원직 상실, 1963년 11월 6대 총선에서 민주당 전국구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1965년 8월 한·일 협정의 국회비준에 반대, 의원직을 사퇴했다. 저서로는 자서전인 『나의 인생백서』, 『한국 농촌경제』등이 있다. 1964년 독립운동 당시의 공을 기려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허 종(許琮)

조선조 세조때 문신으로 자는 종경(宗卿)이고 호는 상우당(尙友黨)이며 양천허씨 13대손이다. 1467년 함경도의 이시애의 난 평정. 1469년 전라도 장영기 일당의 난을 진압, 1477년 평안도의 여진족을 토벌하는 등 무사로서 이름을 떨쳤다. 기골이 장대한 허종은 임금에게도 직언을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자신을 지극히 칭찬하고 아껴주던 세조의 여섯 가지 잘못을 서슴없이 지적, “이단을 물리치고 언로(言路)를 열 것이며 유렵을 삼가고 경언(徑言)에 나아 글을 읽으시오”하며 고치라고 하였다. 이에 성격이 대쪽같았던 세조는 노발대발하여 곤장을 치도록 명하였는데 굽히지 않고 직언을 계속하자 마침내 허종을 참수하라는 명령까지 하였다. 세조는 역사에게 “내가 칼집에서 칼을 다 빼는 순간 즉시 허종의 목을 치라”하며 칼을 천천히 뽑아 올렸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였고 세조는 “그래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겠는가?”라며 다시 묻자 허종은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잘못이 없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세조는 뽑던 칼을 도로 칼집으로 넣고 “참으로 사내대장부로다.”라고 감탄과 아울러 칭송하였으며 이후로 더욱 허종을 총애하였다.
허종은 후일 선종이 보위에 오른 후 윤비를 폐하자는 일이 어전회의에서 거론될 때 늙은 누님의 말을 듣고 동생 허침과 함께 짐짓 다리에서 굴러 떨어진 일화도 있다. 이때 허종이 떨어진 다리를 사람들은 종침교(琮琛橋)라 하였다. 좌의정까지 역임한 그는 관직을 물러난 후 다시 고향인 이곳으로 돌아와 평민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허 침 (許琛)

1444(세종26년)~1505(연산군11년). 본관은 양천, 자는 헌지(獻之), 호는 이헌(邇軒)이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며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허종의 아우로서 세조 8년(146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종 6년(1475) 문과에 급제하여 연산군 10년(1504)에 좌의정에 이르렀다.
연산군이 세자일 때 그는 필선(弼善)이었고, 조지서(趙之瑞)는 보덕(輔德)이었는데 연산은 날마다 놀이만 일삼고 학문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았는데 단지 부왕 선종의 훈계가 두려워 억지로 서연(書筵)에 나올 뿐이었다. 조지서는 천성이 굳세고 곧아서 연산이 학문에 태만히 할 적마다 그를 깊이 질책하고 성종에게 이르겠다고 하였는데, 허침은 부드러운 말씨로 매번 깨우쳐 줌으로 연산이 몹시 좋아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연산은 글을 써서 벽에 붙이기를 「조지서는 큰 소인(小人)이요, 허침은 근 성인(聖人)이다」라고 하여 그를 매우 총애 하였다. 연산군이 즉위하고 나서 조지서는 살해되었지만 그는 무사하였고 오히려 우의정에 제수 되었다.
그는 형 허종(許琮)과 함께 명상(名相)으로 일컬어졌는데 그의 누이 역시 학덕과 행실이 뛰어나고 장수하여 문중에서는 “백세 할머니”라고 불렸다. 형제가 모두 누이를 극진히 섬겨서 조정의 대사가 있을 때 마다 꼭 가서 물었는데 성종이 왕비 윤씨(尹氏)를 폐하려 할 때에도 그는 누이에게 이일을 묻고 나서 폐비론에 반대하였다. 뒤에 연산군이 즉위한 뒤에 폐비에 찬성한자들은 모두 주살되었으나 그는 홀로 면하였으니 모두 그 탁견에 감복 하였다고 한다.


허 욱 1548(명종3년)~1618(광해군 10년)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공신(公愼), 호는 부훤(負暄)이다. 우의정 허종(許琮)의 4대손으로 대사헌 허항(許沆)의 손자이며 허응(許凝)의 아들이며,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선조 5년 (1572) 춘당대 문과(春塘臺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선조 25년 (1592)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재임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강(錦江)을 굳게 수비하는 한편, 승병(僧兵)·의병(義兵)과 함께 청주 탈환에 전공을 세워 호서·호남지역을 안전하게 하였다.
선조 26년(1593)에는 충청도 관찰사로서 권율(權慄)의 서울 수복 작전에 가담하였다. 즉, 권율은 한강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진을 치고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는 수원 광교산(光敎山)에, 전라 소모사(全羅召募使) 변이중(邊以中)은 양천(陽川)에, 충청감사 허욱은 파주와 양천을 연결하는 전선에 각각 포진하여 남하하는 명나라 원병과 호응하여 서울에 버티고 있는 왜적을 일거에 부수고 수복을 기한 것이다.
그러나 권율로부터 내포(內浦)가 풍년임에도 군량(軍糧)을 변통치 못한다고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 이조(吏曹)의 요청과 유성룡(柳成龍)의 추천으로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며, 난후 나라전체가 큰 기근에 빠지자 청량사(請糧使)로 명나라에 건너가 산동(山東) 지방의 곡식을 얻어와 백성을 진휼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한성부 판윤·호조·이조판서를 지내고 선조 39년 (1606)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라 양릉부원군(陽陵府院君)을 습봉(襲封)하였다.
광해군 즉위년(1608)에 광해군 대신 영찬대군(永昌大君)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했던 유영경(柳永慶)의 일파라 하여 파직되어 서호(西湖 : 양천현)의 월촌리(지금의 목2동)에서 10년간 살면서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았다. 이어 광해군 8년(16161)에 신경희(申景禧)의 옥사에 연루되어 원주에 귀양가서 그곳에서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 하였다. 그는 말이 적고 일에 임함에 있어 신중하였으며 효성과 우애 또한 지극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관작(官爵)이 복구 되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황 숙(黃璹)

마곡동 후포리의 궁산서쪽 선두암 위 산줄기에 효령대군이 수도하던 “춘조정”이란 정자가 있었는데 나중에 참판 황숙이 이주해 와서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효령대군은 세종대왕의 둘째 형님이며, 춘조정이 있었던 선두암은 88올림픽 고속도로 공사로 없어졌다.)
황숙(黃璹)은 친구인 허봉(허엽의 둘째아들, 허균의 형, 허준의 조카뻘)과 절친하였으며, 나중에 허봉의 형 허성의 손녀딸을 손자인 황여구의 부인으로 맞아들였으니 허씨 집안과 사돈간이 된다. 황숙(黃璹)은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자기고을에 머물러 3개월을 지내는 동안 정성을 다하고 또 자기고을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도록 위로하며 잘 다스리니 임금이 이를 지켜보시고 “거정주인(居亭主人)”이라고 이름지어 불렀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 때 증산(甑山)수령으로 평양에서 왜적을 쳐 전공을 세웠기에 영유현감으로 벼슬을 올려주었으며 나중에 참판까지 오르게 되었다.


황여구

황숙(黃璹)의 아들 황치중과 손자인 황여구, 증손자인 황의·황최·황진은 모두 후포리에서 대대로 뿌리내리고 살아오던 중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이 일어났으며, 이때 황숙의 증손인 황여구와 어머니 심씨(沈氏) 그리고 아우와 누이 두 사람 모두 다섯 사람이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나라가 위급한 것을 보고 의롭게 순사하였다.
이에 이조판서 허성(許筬)의 손녀요 항여구의 妻인 허씨는 돌지난 아들을 업고 몸소 싸움터에 나가 주야로 울며 하늘과 신령에게 축원하고 낚시와 그물을 모아서 7일동안 물속을 찾아 시어머니 심씨와 남편의 사체를 끌어내어 장사지내고 그 통에 다른 죽은 시체들도 건져내어 자기집을 팔아서 음습하여 매장하였다.
이 소문이 조정에 알려져 “허씨”에게는 정문(旌門)을 세워주고 황여구 에게는 지평(持平)을 증직하니 세상에서 말하기를 한집에서 5烈이 났다고 하였다.


황 의
황의의 자는 선백(善伯)이며 호는 후촌(後村)으로 황여구의 아들이다. 병자호란 때 할머니 이하 부친, 숙부, 등 온 집안이 의롭게 죽을 때 한살이었다. 점점 자라자 그는 세상사에 상관하지 않고 오직 독서에만 열중하고 청나라 책력은 보지 않았다. 친척들이 벼슬길에 오르라고 권고할 때마다 그는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되듯이 변천되는 세상에 태어났으니 문을 닫고 ‘춘추(春秋)나 이야기 하는 것이 족하거늘 어찌 명예를 내고 이로운 것을 할 것이냐.”하고 거절하였다. 슬하에 다섯 아들이 있었으나 한 사람도 과거시험장에 보내지 않았다. 이를 본 사람들은 옛날 녹문산(鹿門山)에서 벼슬을 싫다하고 약초를 캐며 살던 사람과 같다고 하였다.


최흥운(崔興雲)
외발산동 경주최씨 문중에서 배출한 최흥운 장군(1602~1636)은 1621년 무과에 등과한 후 형조좌랑으로 재직할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조선조 16대 인조 14년(1636)에 청 태종이 군신(君臣)의 관계를 요구하며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해옴에 따라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최흥운 장군은 두툼한 누빈 솜바지 저고리를 갑옷 속에 입고서 12월 한겨울에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으며, 청나라 군대와 치열한 격전을 치루던 중 포로로 붙잡히게 된다. 청나라 군사들은 최장군을 굶겨 죽이려고 감옥에 가두고 오랫동안 하루 물 한 대접 외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으나 굳건하게 버티게 되므로 기인이라 여겨 두려워하며 방면하게 된다. 사실은 최장군의 누빈 솜바지 저고리에는 솜 대신 미숫가루가 들어 있었는데, 이것을 먹으며 기운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 군사들 중 일부가 조선의 장군 중에 저런 기인을 살려두면 후환이 두렵다고 생각한 나머지 장군을 죽이려고 뒤를 밟게 된다. 장군은 감옥에서 풀려나와 샘물가에서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는 중에, 뒤를 밟고 기회를 엿보던 청나라 군사들이 달려들어 목을 베어 가져갔다.
전쟁이 끝난 뒤 최장군의 죽음을 알게 된 인조 임금은 눈물을 흘리며 최흥운 장군의 목 없는 시신을 정중히 수습하여 장사지내 주었으니 1636년 12월 23일 35세로 일신을 마감하게 된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9년뒤 1645년(을유년)에 인조임금은 최흥운 장군을 “가선대부이조참판”으로 추증하고 외발산동 경주최씨 집성촌에 있는 후손(최흥운 장군 12대손 최기창)의 집에 정문(旌門)을 세워주어 자손대대로 그 공덕을 기리게 하였다.
최장군이 물을 떠마시던 표주박은 자손 대대로 가보로 보관되어 내려왔으나 6.25동란 혼란기 때 잃어버렸다고 한다.


심 정(沈貞)

심정의 호는 소요당(逍遙堂)인데 평소 가양동 구암(탑산) 근방이 지기가 뛰어난 곳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던 중 어느날 탑산 쪽을 다녀오는 길에 잠시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니 산위에서 강을 내려다보는 풍경이 절경 중에서도 뛰어나며 광주바위와 허가바위가 있고 한강변의 절경이 내려다보이는 구암(탑산) 위에 즉시 별장을 짓도록 하고 자신의 호를 따서 소요정이라 하였다. 그는 우의정을 거쳐 1527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그는 후에 복성군의 옥사로 인해 김안노의 탄핵을 받아 양천으로 유배되었다가 박빈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사사(賜死)되었다. 그가 일으킨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강직하기 그지없었던 최숙생의 관직도 삭탈되었는데 그는 관직생활의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소요정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육합(六合) 띠끌 속에 큰 바다가 뜬 듯
이 몸이 꿈속인데 누굴 위해 머무나
이제까지 청운길이 붕새 날개에 걸려
요당(拗堂)에는 풀잎배가 붙은 것 못 보았네
만약 자유롭게 놀아서 참으로 즐길 수 있다면
비록 인작(人爵) 없으나 다시 무엇 구하리
멀리 생각하건데 술잔 잡고 등림(登臨)하는 곳에
물결따라 출렁이는 갈매기 보고 있으리

라고 하면서 높은 관직에 오르려 안간힘을 다하는 사람들도 소요정에 올라보면 바다같은 세상사 가운데 벼슬이란 먼지처럼 작고 미약한 것이므로 연연하지 않고 살아가는 최선의 길을 택하라고 말해주고 있다. 환경을 잘보고 행동 해야만 겨우 인간이 주는 최고의 영광인 인작(人爵)을 받을 수 있지만 도덕과 수고(壽考)하는 것은 하늘이 주는 천작(天爵)을 받는 것이라 하였다. 소요정에서는 천작과 인작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문계창도 바다가 가까운 이곳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세상은 바다인데 한 몸이 떴다 가는 것을
누가 밀며, 그친 것은 누가 멈춰줬나
먼지 같은 세상을 향하여 아름다운 그릇(벼슬) 거두기 싫어하여
강위에 와서 조각배를 갖추기 힘썼네
임금 은총은 분수가 있는 듯 하나 도리어 분수가 아니었고
신선 경지 못 구할 듯 또한 구할 수 있다.
낭묘(조정)의 강호가 서로 어긋나지 않은 것
생각을 바꿔서 갈매기 놀램을 꺼리어 미워하지 말라

티끌과 아지랑이로 이루어진 세상을 살면서 서로 미워하고 보다 높은 벼슬길로 올라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는 의미에서 장자가 지은『남화경』의 제1장 소요정에서 이름을 따온 소요정에 올라 분수에 맞추어 살 것을 강조하였다.



송인명(宋寅明)

개화사(약사사) 산방에서 공부를 했다는 송인명(1689~1746)은 이조참판을 지낸 송광연의 손자이자. 호는 장밀헌(臧密軒)인데 1719년 중광문과에 올라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제수 받았다. 세자시강원의 설서로 있을 때 당시 세제(世弟)로 있던 영조의 총애를 받아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충청도 관찰사로 기용되었다. 이듬해는 동부승지가 되어 붕당(崩唐)의 금지를 건의하자 왕이 받아 적극적인 탕평책을 전개하였다. 소론 탕평재상으로 세도를 담당하였는데, 1731년 이조판서가 되어 온건한 인물들을 두루 등용하여 당론을 조정, 완화함으로써 더욱 두텁게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1736년에 우의정이 되자 도성안의 권세있는 집에서의 공물매득(貢物買得)을 금지하는 법을 건의하여 영조의 재가를 받았다. 이듬해 개화사를 크게 중수하고 절 아래에 불향답을 사서 시주하기까지 하였다.
송인명의 개화사 중수 및 시주에 관한 사실을 그의 현손인 송백옥이 1887년에 중수기를 지으면서 밝혀놓은 이야기이다. 송인명이 어리고 가난했을 때 역시 빈찰을 면치 못했던 개화사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글 읽던 기억을 잊지 못했기에 성공하고 난 후 그 보답을 했던 것이다. 글 읽다 나와 보면 수려한 산하경관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끝내 이근방의 풍경을 못잊어 후일 그가 맞은편 덕양산(행주산성)에 자신의 호를 딴 장밀헌이라는 별장을 으리으리하게 지을 수도 있었다. 이 장밀헌의 경영은 아마도 개화사의 중수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듯하다. 이러한 개화사와 송인명의 불가분한 관계에 대해 당대 진경시(眞景詩)의 태두인 사천 이병연이 송인명의 친척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보냈다.

봄이 오면 행주배에 오르지 마오 春來莫上杏州舟 (춘래막상행주주)
손님 오면 어찌 꼭 소악루만 오르려하나 客到何須小嶽樓 (객도하수소악루)
책을 서너번 다 읽을 곳이라면 書冊三餘完課處 (서책삼여완과처)
개화사에서 등유(燈油)를 소비해야지 開花寺裏費燈油 (개화사이비등유)


엄흔(嚴昕)

엄흔(1508~1553)의 호는 십성당으로 영월사람이다.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적에 이르렀으며 조정에서는 바른말을 하여 김안노를 막아 물리친 바도 있다. 손자인 엄후(嚴小厚)의 호는 막여정으로 엄인달(嚴仁達)의 아들이다. 벼슬은 교관에 이렀으며 광해군 5년(1613)에 인목대비를 폐할 의논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현 등촌동인 등마루 북변에 그의 호를 딴 막여정(莫如亭)이란 정자를 짓고 아우인 엄성과 함께 관직을 물러난 후 만년을 한가롭게 보냈다.



김말손(金末孫)

본관은 원주(原洲),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병마절도사를 지냄.
용감하고 호방한 무장으로 염창동 “귀신바위설화”의 주인공이며 영벽정 정자를 짓고 강서구에 원주김씨의 뿌리를 심어 그 후 많은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게 되었다.

귀신바위설화를 간략히 소개하면. 쾌청한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일어나고 바람이 거세게 불며 캄캄하여졌다. 이때 집채만한 큰 바위가 한강위쪽에서 마을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염창동까지 와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앉았다. 그런데 바위가 내려앉은 일대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즉 헐벗은 산판에 갑자기 수림이 무성해 지고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올라갔다. 그러자 숲속에는 또 사나운 짐승떼들이 날뛰며 울부짖기 시작하였다. 연달아 일어나는 이변에 부근 사람들은 모두 기겁을 하고 당황하였다. 이에 마을사람들이 7일간 정성을 들여 비니 하늘이 청명해지고 짐승들도 조용해졌다. 몇 달 후 한농부가 밭을 갈기 위하여 바위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우르릉하고 큰 소리가 나더니 바위가 굴러 농부에게로 달려드는 것이었다.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달렸지만 바위의 속력을 당해낼 수 없어 결국 바위에 깔려 죽고 말았다. 이러한 소문은 강 건너 한양의 김말손 장군에게까지 알려졌다. “저런 고얀 일이 있나, 그 바위에 귀신이 붙었나 보다. 내 당장 가서 귀신을 잡아야 겠다”하며 무기를 준비해 가지고 강을 건너 염창동으로 나갔다. 부하들이 만류하였지만 김말손 장군은 기어코 귀신을 처단하고야 만다면서 바위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자 이변이 또 일어났다. 갑자기 뇌성벽력이 일어나고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김장군을 따라온 장졸들이 모두 멀찌감치 물러나서 동정만을 살피었다. 그러나 김말손 장군은 겁내지 않고 바위를 향하여 꾸짖었다. “이 요사한 돌귀신아! 어찌하여 이곳에 나타나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히느냐? 내 이제 너를 잡으려고 여기에 왔다”고 외치니 바위는 돌연 환한 빛을 내며 굴러서 길말손에게로 대들었다. 김말손은 “에잇-”소리와 함께 힘껏 활을 당겨 쏘았고 화살을 중허리에 맞은 바위는 큰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화살이 깊숙이 박힌 바위 한가운데에서는 시뻘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위에 의탁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고 백성을 괴롭히던 악귀는 김말손 장군의 화살에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따라서 하늘은 다시 청명해지고 광풍도 뇌성도 멎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제서야 안심하고 각자 맡은 일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을의 평화는 회복되었다. 그 후 부근 사람들은 김말손 장군의 무공과 은공을 기념해서 바위곁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영벽정(映碧亭)이라 하였다.


김응남 (金應南)

김응남(1546~1598) 본관은 원주. 호는 두암(斗巖). 김말손의 증손임.
양천현 출생으로 화곡4동 능골에 묘가 있었으나 1972년 3월 30만 단지 조성 때 묘를 이장하였다.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에 등용되었다. 158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서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논핵(論劾)한 삼사(三司)의 송응개(宋應漑) · 허봉(許) 등이 도리어 유배당할 때 그들과 일당이라는 혐의를 받고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좌천되었으나, 선정(善政)을 베풀어 기민(飢民)을 구휼하고 (탐라지(眈羅誌)에 기록 ) 2년 뒤 우승지(右承旨)를 제수받았다.
1591년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와 한성부판윤으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으로 평안도로 피란하는 선조를 호종하였으며, 1594년 우의정, 1595년에 좌의정이 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안무사(按撫使)로 영남에 내려가 풍기(豊基)에서 병을 얻어 서울에 돌아온 뒤 관직을 사퇴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책록되어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김덕원(金德遠)

본관 원주(原州). 자 자장(子長). 호 휴곡(休谷).
김말손 장군의 후손으로 1654년(효종 5) 진사시에 합격하고, 1662년(현종 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등용되었다. 1666년 경안도찰방(察訪)으로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전적(典籍)·지평(持平)·관찰사, 형조·호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687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689년(숙종 15)에 우의정에 올랐다. 1691년 중추부영사가 되었으며, 1694년 폐비 민씨 복위운동을 반대하여 제주에 유배, 숙종 22년에 풀려나와 양천에서 별세하였다. 양천현에서 태어났으며, 화곡4동 능골에 묘가 있었으나 1972년 3월 30만 단지 택지개발로 이장하였다.
강서구에 현존하는 유일한 보물인 김덕원공 출토의복은 1972년 3월 김덕원공 묘에서 총 53종 68점이 나왔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복식으로 조선중기 상류사회의 복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국가문화재 보물 제672호)


김득남(金得男)  1601(선조35년) ~ 1637(인조15년)

조선중기의 무신이며 충신,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字는 선술(善述), 호는 매죽헌(梅竹軒)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원종공신에 올랐다. 인조14년(1636) 병자호란때 한강을 지키는 철곶첨사로 임명되어 수비하였으며, 이듬해 적이 강화에서 물러나자 스스로 모집한 병사 30여명을 거느리고 부평 계양산 아래 굴포까지 진격하여 적 수백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조선의 여인을 구출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어 도망가는 적을 계속 추격하여 싸우던 중 적의 화살을 맞고 순절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신의 정려(旌閭)를 명받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무안의 모충사 및 표충단에 배향되었으며 묘는 전남 무안군 해제면 상감산에 있다.


김수동(金壽童)

김수동 (1457~1512) 본관 안동. 호는 만보당(晩保堂). 시호 문경(文敬). 1474년(성종 5)생원이 되고, 147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자(正字) ·사인(舍人) 등을 지냈다. 연산군 초에 전라 ·경상 ·경기도의 관찰사를 거쳐, 1499년(연산군 5) 예조참판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성학심법(聖學心法)》 4권을 구하여 왔다. 1503년 경상도관찰사 · 형조판서 겸 춘추관지사 ·홍문관제학(提學) 등이 되고, 이듬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정헌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1506년 어머니상을 당하여 사직하였으나, 왕명으로 단상(短喪)으로 마치고 우의정에 부임하였다.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좌의정에 오르고,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 영가부원군에 봉해졌다. 1510년(중종 5) 영의정에 올랐다. 재치가 넘쳐 연산군의 폭정으로부터 많은 문신들을 구하였으며 청렴을 지켰다. 고향인 당곡에(신정동) 영의정 김수동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김천일(金千鎰)

본관 언양. 호 건재(健齋) ·극념당(克念堂). 시호 문열(文烈). 이항(李恒)의 문인. 삼장사(三壯士)의 한 사람.
1573년(선조 6)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되고, 1578년 임실현감(任實縣監)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나주에 있다가 고경명(高敬命) ·박광옥(朴光玉)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선조가 피란간 평안도를 향해 가다가, 왜적과 싸우면서 수원성(水原城)을 거쳐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 공으로 판결사(判決事)가 되고 창의사(倡義使)의 호를 받았다.
왜적에게 점령된 서울에 결사대를 잠입시켜 싸우고, 한강변의 여러 적진을 급습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때 가양동 궁산의 양천고승지에 주둔하여 변이중 우성전 등과 더불어 권율장군을 도와 행주산성 전투에 협공하였다. 다음해 정월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의 군대가 개성을 향해 남진(南進)할 때, 그들을 도와 도로(道路) ·지세(地勢) 및 적정(敵情) 등을 알려 작전을 도왔다. 또 왜군이 남쪽으로 퇴각하자, 절도사 최경회 등과 함께 진주성(晋州城)을 사수(死守)하였다. 그 뒤 진주성을 지킬 때 백병전이 벌어져, 화살이 떨어지고 창검이 부러져 대나무 창으로 응전하였다.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아들 상건(象乾)과 남강(南江)에 투신자결하였다.
좌찬성(左贊成)이 추증되고,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 등에 배향(配享)되었다. 저서에 《송천집(松川集)》, 문집에 《건재집》이 있다.


변이중 (邊以中)

본관 황주. 호 망암(望菴). 장성(長城) 출생. 이이(李珥)의 문인. 1568년(선조 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7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 소모어사(召募御史)가 되어 병마·군기(軍器)를 수습하고, 수원에 주둔하여 기호(畿湖)의 적에 대비하였다. 그 뒤 조도사(調度使)가 되어 직접 양천의병들을 거느리고 가양동 궁산의 양천고승지에서 행주산성 전투에 협공하여 큰 공을 세웠다.
독운사(督運使)를 지내면서 군량 수십만 석을 조달, 명나라 군대에 대주었다. 1603년 함안군수로 갔다가 2년 뒤 사임하고, 장성에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 이조참판에 추증, 장성 봉암서원(鳳巖書院)에 제향 되었다. 그의 화차 제조는 조선 과학사에 있어서 큰 업적으로 평가된다. 문집에 《망암집》이 있다.


심수경(沈守慶)

본관 풍산(豊山). 호 청천당(聽天堂). 심정의 손자이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직제학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로 있을 때 중종의 능을 천장(遷葬)하게 되자 대여(大輿)가 한강을 건너는 선창을 설치하지 않은 죄로 파직되었으나, 후에 대사헌, 팔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50년이 넘는 벼슬살이를 했으나 근검하며 청빈하고 성품이 온화하여 남의 원한을 사지 않으므로 청백리에 올랐다. 1590년 우의정에, 그리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체찰사가 되어 의병모집에 힘썼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현재 방화3동 개화산입구에 묘소가 있음. 저서에 『청천당시집』『청천당유한록』등이 있다.


우성전(禹性傳)

본관 단양(丹陽). 자 경선(景善). 호 추연(秋淵)·연암(淵庵). 이황(李滉)의 문하생.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봉교(奉敎)·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1583년 응교(應敎)에 오르고,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남인의 거두로 앞장을 섰으며, 1591년 서인 정철(鄭澈)이 물러날 때 북인의 책동으로 삭직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에서 수천 의병을 모집, 추의군(秋義軍)이라 하고 강화에 들어가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도처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 뒤 대사성에 특진되었으나 의병장으로서 계속 활약, 퇴각하는 왜군을 의령까지 추격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서되었다. 대사성 우성전은 허엽(허성·허봉·허난설헌·허균의 부친)의 사위가 된다. 저서에 『역설(易說)』 『이기설(理氣說)』 『계갑일록(癸甲日錄)』 등이 있다.


유담후(柳譚厚)

본관 문화(文化). 호 결청재(潔淸齋). 현 내발산동에서 자랐으며 1651년(효종 2) 사마시를 거쳐, 1665년(현종 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은퇴해 있다가, 1678년(숙종 4) 정언(正言)에 초임, 사서(司書) ·지평(持平) 등을 지내고 다시 은퇴했다. 1680년(숙종 6) 헌납에 등용되고 홍문관에 발탁되어 부수찬을 역임했다. 이어 울산부사로 나가 탐학한 토호를 잘 다스리고 송사를 잘 처리했다. 그 후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의 천거로 오위장(五衛將)에 등용되고, 1685년(숙종 11) 우승지에 이르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저서에 『성능유의(成能遺義)』가 있다.


유상운(柳尙運)

본관 문화(文化). 호 약재(約齊) ·누실(陋室). 양천구 신정동에서 자랐으며 1660년(현종1) 진사가 되고, 16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교리 등을 지냈다. 1679년(숙종5) 문신정시에 장원, 1680년 대사간에 특진되었다. 이때 서인으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자 남인에 의해 추대되었다 하여 복성군(福城君)을 탄핵하고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683년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서인이 분당되자 소론에 속하여 노론 김석주(金錫胄)의 전횡을 탄핵했다. 1685년 호조판서 등에 이어 형조판서를 지냈다.
1694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를 비방하는 서한을 장희빈(張禧嬪)에게 보낸 장희재(張希載)의 처형을 둘러싸고 노론의 반대에 부딪혀 사직, 성밖에서 대죄했다. 그 뒤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고 1698년 영의정 때 소론의 영수 최석정(崔錫鼎)을 변호하다가 삭직 당했다. 1699년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었으나 당쟁을 일삼는다는 노론의 탄핵으로 중추부판사가 되었다. 1701년 무고(巫蠱)의 옥사가 일어나 장희빈까지 연루되자 세자의 생모를 사사(賜死)할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파직되고, 1702년 직산(稷山)에 유배, 1705년 중추부행판사로 복직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나주(羅州) 죽봉사(竹峰祠)에 제향되었다.



이덕형(李德泂)

본관 한산(韓山). 호 죽천(竹泉). 염창동 강변에 이수정 정자를 지었음.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봉교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인목대비에게 반정을 보고하고 능양군(綾陽君:仁祖)에게 어보(御寶)를 내리게 하였으며 1624년(인조 2)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형조판서·의금부판사·돈령부지사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 병자호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죽창한화(竹窓閑話)』 『송도기이(松都記異)』등이 있다.